번아웃으로 무너졌을 때 검색해서 나오는 조언은 대개 "휴직을 신청하라"로 시작한다. 한국에서는 그 문장이 성립하지 않는다. 근로기준법에 업무 외 상병에 대한 병가 조항이 없다. 유급 병가나 질병휴직은 회사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에 있을 때만 존재하는 임의 제도다.

그래서 순서가 다르다. ① 진단서를 받을 병명 → ② 우리 회사 취업규칙에 병가 조항이 있는지 → ③ 없으면 어떤 경로가 남는지 → ④ 무료로 상담받을 곳. 첫 단계가 병명인 이유는 아래에 있다.

번아웃은 진단명이 아니라서 진단서에 다른 병명이 적힌다
번아웃은 진단명이 아니라서 진단서에 다른 병명이 적힌다

① '번아웃'으로는 진단서가 안 나온다

WHO는 ICD-11에서 번아웃을 "성공적으로 관리되지 않은 만성적 직장 스트레스로 인한 증후군"으로 정의하고, 탈진·업무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직업 효능감 저하의 세 차원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같은 발표에서 번아웃은 질병(medical condition)이 아니라고 명시한다. ICD-11에서 번아웃이 놓인 자리는 질병 분류가 아니라 '건강 상태에 영향을 주는 요인' 항목이다.

실무적으로 이게 무슨 뜻인가. '번아웃'이라는 병명으로는 진단서가 발급되지 않는다. 국내에서 실제로 적히는 병명은 우울증(F32), 적응장애(F43.2), 불안장애 계열이다.

그리고 진단서의 병명이 뒤에 오는 모든 문의 열쇠가 된다. 상병수당, 질병휴직, 산재 신청, 실업급여 예외 — 넷 다 입구에서 진단서를 본다. 그래서 병원에 갈 때 "번아웃인 것 같다"가 아니라 증상을 시간 순으로 말하고, 어떤 병명으로 기록되는지 확인하는 것이 첫 단계다.

② 취업규칙을 먼저 펴본다

한국에 법정 병가가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면 첫 행동이 바뀐다. 휴직을 신청하는 게 아니라 내 회사에 신청할 제도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에서 볼 것은 세 가지다.

  • 병가 또는 질병휴직 조항이 있는가
  • 있다면 유급인가 무급인가
  • 며칠까지인가, 진단서 제출 요건은 무엇인가

조항이 있으면 그 절차를 따른다. 없으면 아래 순서로 내려간다.

③ 병가 조항이 없을 때 남는 경로

연차 소진 → 무급 개인휴직 협의 → 상병수당(지역 해당 시) → 산재 신청 순으로 검토한다.

상병수당은 아직 전국 제도가 아니다. 2022년 7월 시작한 보건복지부 시범사업이고 2026년 현재도 시범 단계로, 지정된 지역에서만 신청할 수 있다. 내 거주지가 대상인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다.

구분2026년 기준
2단계 지역1일 49,540원 (최저임금의 60%)
3단계 지역 건강보험 직장가입자직전 3개월 평균임금의 60% (하한 49,540원, 상한 68,100원)
대기기간7일
최대 지급150일
산재는 사업장 규모와 무관하게 열려 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7조 제1항 제2호는 업무상 질병에 "직장 내 괴롭힘,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업무상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질병"을 명시한다. 구체적 인정기준은 시행령 별표3이 정하고, 인정에는 세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 위험요인 노출 경력, 업무 시간·기간·환경상 발병 가능성, 노출과 발병의 의학적 인과관계.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는 20일이고 10일까지 연장될 수 있다. 정신질환 산재 인정 기준에서 절차를 확인할 수 있다.

회사에 요구할 근거가 되는 조항이 산업안전보건 규칙에 있다
회사에 요구할 근거가 되는 조항이 산업안전보건 규칙에 있다

회사에 요구할 수 있는 근거

"조직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보다 조문 하나가 낫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669조(직무스트레스에 의한 건강장해 예방 조치)는 장시간 근로, 야간·교대작업, 차량운전, 정밀기계 조작처럼 스트레스가 높은 작업에 대해 사업주가 다음을 하여야 한다고 정한다.

  • 직무스트레스 요인을 평가하고 근로시간 단축·순환작업 등 개선대책을 시행할 것
  • 작업계획을 수립할 때 해당 근로자의 의견을 반영할 것

권고가 아니라 사업주 의무다. 근로시간 단축이나 업무 조정을 요청할 때 이 조항을 근거로 쓸 수 있다.

5인 미만이면 달라지는 것

괴롭힘이 원인인 경우 짚어야 한다. 근로기준법 제76조의2·제76조의3(직장 내 괴롭힘 금지와 조사 의무)은 상시 5명 이상 사업장에만 적용된다. 4명 이하 사업장에서는 회사에 조사를 요구할 법적 근거가 없다.

그래도 닫히지 않는 통로가 있다.

  • 산재보험 — 사업장 규모 무관
  • 상병수당 — 지역 해당 시
  • 근로복지공단 EAP·근로자건강센터 — 아래 창구들
  • 남녀고용평등법상 성희롱, 형법상 폭행·모욕 — 별도 경로

무료 상담 창구는 회사 EAP가 없어도 국가가 운영한다
무료 상담 창구는 회사 EAP가 없어도 국가가 운영한다

④ 무료 상담 창구 — 회사에 EAP가 없어도 있다

회사가 심리상담 제도를 안내하지 않는다고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국가가 운영하는 무료 창구가 있다.

창구대상·한도연락
근로복지넷 EAP300인 미만 사업장 근로자, 무료, 연 7회·회당 50분근로복지공단
근로자건강센터 23개소 · 직업트라우마센터 13개소50인 미만 우선1577-6497
정신건강상담전화24시간1577-0199
보건복지상담센터제도 안내129
2025년부터 바뀐 것도 있다. 20~34세는 일반건강검진에서 2년 주기로 정신건강검사(PHQ-9, CAPE-15)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자가 점검표를 혼자 채워 보는 것과 검진 기록으로 남는 것은 다르다 — 뒤에 진단서나 산재 신청으로 갈 때 시계열 자료가 된다.

퇴사를 결심하기 전에 의사 소견서와 휴직 요청 거부 기록을 확보한다
퇴사를 결심하기 전에 의사 소견서와 휴직 요청 거부 기록을 확보한다

퇴사를 택할 때 — 서류는 퇴사 전에

번아웃 퇴사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 다만 조건이 까다롭고, 결정적으로 서류를 퇴사 전에 확보해야 한다.

근거는 고용보험법 시행규칙 별표2의 '수급자격이 제한되지 아니하는 정당한 이직 사유'다. 문언은 이렇다 — 체력의 부족, 심신장애, 질병, 부상 등으로 주어진 업무 수행이 곤란하고, 기업의 사정상 업무 종류의 전환이나 휴직이 허용되지 않아 이직한 것이 의사의 소견서, 사업주 의견 등에 근거하여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경우.

즉 두 가지가 필요하다.

  1. 의사 소견서 — 업무 수행이 곤란하다는 내용
  2. 사업주 의견 — 업무 전환이나 휴직을 요청했으나 회사 사정으로 허용되지 않았다는 사실

두 번째가 핵심이다. 아무 말 없이 사직서만 내면 자발적 이직이 되고, 나중에 소견서만으로는 뒤집기 어렵다. 요청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거부됐다는 답을 받아 두는 것을 퇴사 전에 해야 한다. 메일이나 메신저로 요청하고 답을 보관하면 된다.

팀을 바꿀 수 있는 위치라면

Google이 자체 공개한 효과적인 팀 연구는 다섯 요소를 중요도 순으로 심리적 안전, 신뢰성, 구조와 명확성, 일의 의미, 임팩트로 제시하고 심리적 안전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든다. 국제노동기구도 직업 스트레스 보고서에서 합리적 업무량 배분과 자율성을 예방의 축으로 다룬다.

개인 회복과 별개로, 재발을 막는 것은 결국 업무량과 자율성이라는 뜻이다.

정리 — 순서대로

  1. 병원에서 어떤 병명으로 기록되는지 확인한다. '번아웃'은 진단명이 아니다
  2. 취업규칙의 병가·질병휴직 조항을 찾는다. 유급인지, 며칠인지
  3. 조항이 없으면 연차 → 무급휴직 → 상병수당(지역 확인) → 산재 순으로 내려간다
  4. 상담은 1577-6497(근로자건강센터)이나 1577-0199(정신건강상담전화). 300인 미만이면 근로복지넷 EAP가 연 7회 무료
  5. 퇴사를 생각하면 퇴사 전에 의사 소견서와 '휴직 요청 거부' 기록을 받아 둔다
  6. 5인 미만이라도 산재보험과 상병수당, 무료 상담은 열려 있다

이 글은 WHO의 번아웃 정의, 근로기준법·산재보험법·산업안전보건기준 규칙·고용보험법 시행규칙과 보건복지부·근로복지공단 안내를 근거로 정리했다. 상병수당은 시범사업이라 대상 지역과 금액이 바뀌고 최저임금도 매년 고시되므로, 신청 직전에 위 링크에서 그 시점의 조건을 확인하는 편이 안전하다. 증상이 심하거나 자해 생각이 있으면 제도 검토보다 1577-0199 상담이 먼저다.